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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의 이유와 전개 과정 및 전쟁의 영향

by Θ▒∮㎮ˇㅅº 2022. 9. 28.

 구교(가톨릭)와 신교(프로테스탄트)의 대립으로 일어난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의 이유와 전개 과정 및 전쟁의 영향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30년 전쟁의 이유

 

1517년 교회의 타락을 비판한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기존 가톨릭(구교)에서 신교(프로테스탄트)가 분리되었다.

 

이후 구교와 신교 사이의 반목과 박해는 날로 심해져갔다. 이에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열렸는데, 이 화의에서 루터파 개신교도들에게 가톨릭교도와 동등한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때 인정된 신앙 선택의 자유는 오직 영주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일반 개인은 영주가 선택한 종교를 믿어야 했다. 또한 공인된 신교는 루터파뿐이었고 칼뱅파 신교도들은 제외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구교와 신교 사이에 평화가 찾아올 듯하였으나 여전히 구교와 신교 간의 반목은 줄지 않았고, 이러한 종교적 상황을 정치에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더해져 엄청난 사상자를 낸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이 발발한다.

 

 

30년 전쟁의 전개 과정

 

30년 전쟁은 크게 4기로 구분되는데 아래와 같은 전개 양상을 띤다.

 

① 제1기(1618 ~ 1620)

 

1617년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의 왕이 된다. 그는 이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인정한 종교 선택의 자유를 깨고 가톨릭 신앙을 강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에 신교를 믿고 있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1618년 국왕의 사절인 가톨릭 의원들을 프라하 성의 창 밖으로 던져버리는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을 일으킨다. 약 20m의 높이에서 추락했음에도 그들은 다행히 살아남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르디난트 2세는 분노한다. 

 

1619년에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겸임하게 되자 신교도 귀족들은 칼뱅파 귀족인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시킨다.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페르디난트 2세가 신교도 귀족들의 반란을 물리치고 보헤미아의 지배권을 되찾으면서 신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진다.

 

 

② 제2기(1925 ~ 1629)

 

덴마크의 왕인 크리스티안 4세는 이전부터 독일 북부 영토를 차지하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에 개신교도인 크리스티안은 탄압받는 신교도들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독일을 침략하러 나선다. 

 

영국과 네덜란드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은 크리스티안이 독일 북부를 침공하면서  30년 전쟁의 제2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독일에 비해 현저하게 약했던 덴마크는 독일에 패하였고, 양측은 뤼베크 조약을 맺으며 화해한다. 뤼베크 조약에 따라 덴마크는 영토의 일부를 독일에 양도하고 더 이상 30년 전쟁에 관여할 수 없게 된다.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은 가톨릭 영지에서 신교도들을 추방하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신교도들이 획득한 교회재산을 가톨릭 교회에 넘겨주는 복구령을 발표하는 등 신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한층 심해진다.

 

 

 

 

③ 제3기(1930 ~ 1635)

 

프랑스의 후원을 얻은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는 신교를 옹호하며 독일과 전쟁을 시작한다. 스웨덴 군은 초반에 독일에 우세한 듯 보였으나 구스타브 2세의 전사와 함께 스페인의 참전 후 계속되는 패배로 결국 프라하 화의를 맺으며 전쟁은 잠시 종결된다.

 

 

④ 제4기(1635 ~ 1648)

 

이전의 전쟁 동안 배후에서 후원을 하던 프랑스가 이제는 전면에 나서 독일과 맞서게 된다. 프랑스는 스웨덴과 함께 신교의 편에 서서  독일을 침공하고 에스파냐에 선전포고를 하며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팽팽한 접전이 계속되던 중 점차 프랑스를 비롯한 신교도 측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다. 

 

이에 1641년 독일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3세는 종전을 제의했으나 1644년이 되어서야 강화 회의가 시작된다. 

 

결국 1948년에 베스트팔렌조약이 체결되면서 30년 종교전쟁의 막이 내리게 된다.

 

 

30년 전쟁의 영향

 

30년 전쟁을 종결지은 베스트팔렌조약은 기존 유럽의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다.

 

신성로마제국이 약 300여 개의 소국으로 쪼개지면서 사실상 붕괴되었고, 30년 전쟁의 주요 무대였던 독일은 인구의 800만 명가량이 사망했다. 전쟁에 의한 학살, 기아, 전염병 등 신앙의 자유라는 허울 좋은 미명 아래 사람들은 가혹한 삶을 살아야 했다.

 

에스파냐는 이제까지 유럽에서 누리던 지배력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 피레네 산맥과 라인강 일부까지 국경을 확장한 프랑스와 발트해를 비롯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스웨덴이 유럽에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또한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루터파 신교는 물론 칼뱅파 신교까지 가톨릭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게 되면서 구교인 가톨릭은 점차 쇠퇴하고 신교가 부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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