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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발생 배경과 전개 과정 및 백년전쟁의 영향 간단 요약

by Θ▒∮㎮ˇㅅº 2022. 10. 12.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00여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전쟁의 발생 배경과 전개 과정 및 백년전쟁의 영향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백년전쟁의 발생 배경

 

백년전쟁 발생의 표면적인 이유는 프랑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대립이었지만, 본질적 이유는 플랑드르 지역(현 벨기에)의 지배권에 있었다.

 

플랑드르 지역은 프랑스 영토 내 위치했지만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이 지역의 발달한 양모 산업은 영국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프랑스는 플랑드르를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328년 프랑스의 샤를 4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그의 사촌 동생인 필리프 6세가 왕이 되었다.

 

이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은 전 프랑스 왕인 필리프 4세의 손자이며 자신의 어머니는 샤를 4세의 누나라는 이유를 들며 자신이 프랑스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나섰지만 프랑스는 이를 무시하였다. 

 

왕이 된 필리프 6세는 1337년에 플랑드르를 공격하며 프랑스 내 영국 땅을 몰수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기나긴 백년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백년전쟁의 전개 양상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치러진 백년전쟁은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 (1337 ~ 1360)

 

1337년 프랑스 내에 있는 영국 땅을 몰수하겠다고 선언한 필리프 6세는  1339년에는 잉글랜드의 데번, 서식스, 켄트 지역을 공격했다.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군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승리가 점쳐졌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1340년에 슬뢰스 해전에서 프랑스에 크게 승리하며, 1341년에는 브르타뉴를 침공한다.

 

이어 잉글랜드는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장궁(長弓, longbow)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압도적으로 많았던 프랑스군에 크게 승리하고 1347년 칼레를 함락하면서 전쟁에서 우위를 점령한다. 

 

그러나 이 시기 전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은 잠시 중단된다. 

 

1356년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에드워드 흑태자가  프랑스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재개된다.

 

에드워드 흑태자는 푸아티 전투에서 프랑스에 승리하고 필리프 6세에 이어 왕이 된 장 2세를 인질로 삼는다. 

 

1360년 프랑스는 장 2세의 몸 값 지불과 아키텐 지방과 칼레시의 지배권을 영국에 넘기는 것을 약속하고, 이에 영국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브레니티 조약'을 체결하면서 백년전쟁의 1단계가 끝난다.

 

 

2단계 (1369 ~ 1399)

 

인질이었던 장 2세가 조약을 이행하기 전에 죽자, 장 2세의 아들 샤를 5세가 전쟁을 재개하면서 백년전쟁의 2단계가 시작된다. 

 

1369년 아키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침공한 샤를 5세는 1372년에는 푸아티에, 푸아투, 라로셀 지역을 1374년에는 아키텐과 브르타뉴를 정복하며 브레티니 조약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시작한다.

 

샤를 5세는 가스코뉴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지역을 되찾지만 1380년 샤를 5세가 사망하며 다시 전쟁은 중단된다.

 

 

 

 

3단계(1399 ~ 1429)

 

새롭게 잉글랜드의 왕이 된 헨리 4세가 1399년 프랑스를 공격하며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헨리 4세가 사망 한 뒤 헨리 5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을 무렵 프랑스는 부르고뉴 파 귀족들과 아르마냐크 파 귀족들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파 귀족들과 손잡고 프랑스를 공격했고, 1415년 아쟁크루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다.

 

1419년 노르망디까지 정복한 헨리 5세는 1420년 프랑스와 트루아 조약을 맺어 프랑스의 왕위 후계자 권리를 얻었지만 왕위를 계승하기 전인 1422년 사망한다.

 

곧이어 프랑스의 샤를 6세도 잇달아 사망한다.

 

이에 어린 나이의 헨리 6세가 트루아 조약을 들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임을 자처하지만 프랑스는 샤를 6세의 아들인 황태자 샤를을 왕으로 지지한다.

 

이에 잉글랜드는 1428년 황태자의 요새인 오를레앙을 포위한다.

 

 

4단계(1429 ~ 1453)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들었다는 소녀 '잔 다르크'가 샤를 황태자를 찾아가 군대의 결집을 요청한다. 

 

1429년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새로 개발된 대포의 사용으로 오클레앙을 포위한 잉글랜드 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승리로 황태자 샤를은 왕위에 올라 샤를 7세가 된다.

 

1930년 잔 다르크가 부르고뉴에서 포로로 잡히게 된다. 

 

부르고뉴는 이전 헨리 5세와 손을 잡고 프랑스군을 공격했던 것처럼 잉글랜드의 편에 서 있었기에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 군에 넘겨지고, 1931년 잔 다르크는 종교 재판에서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화형에 처해진다. 

 

이후 부르고뉴와 잉글랜드의 동맹은 1435년에 깨진다.

 

1445년에 일 드 프랑스, 1450년에는 노르망디, 1445년에는 아키텐을 차례로 탈환한 프랑스는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잉글랜드에 크게 승리한다.

 

잉글랜드는 결국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영토를 프랑스에 넘기면서 백년전쟁이 끝이 난다.

 

이후 1558년 프랑스 지역 중 유일하게 잉글랜드의 영토였던 칼레까지 프랑스에 넘기게 된다. 

 

 

백년전쟁의 영향

 

백년전쟁을 치르는 도중 많은 귀족들은 왕을 중심으로 뭉쳤고 이는 왕권의 강화를 가져왔다. 

 

또한 평상시에도 유지되는 상비군 제도의 도입으로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한 관료제도가 만들어졌고, 국왕의 상비군 강화는 귀족세력의 약화를 가져와 중앙집권 국가로 나아가게 되었다.

 

오랜 시간 계속된 전쟁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국민들에게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민족주의 감정을 싹트게 했고 이는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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